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문단 편집) === 가족 관계 === 응게마는 일생 동안 총 3명과 결혼했는데, 1945년경에 처음 만난 첫째 아내 아다(Ada)와는 여러 자녀를 뒀지만[* 정황상 모두 어릴 적에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10대의 스페인인과 불륜을 저지른 것이 발각되어 이혼당했고,[* 그 불륜 상대와 가족들은 응게마가 자치 정부의 부통령으로 일할 때에 추방되었다고 한다.] 1964년에 결혼한 둘째 아내 클라라 앙게 오사(Clara Angué Osá)와의 사이에는 3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그 중 1명은 어릴 적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 정착민의 혼혈 딸로, [[금발]]을 가졌던 모니카 빈당 아용(Monica Bindang Ayong)을 첩으로 삼았다가 사랑에 빠진 나머지 둘째 아내를 버리고 모니카를 셋째 아내로 삼아 2명의 자식을 낳았다. 응게마는 모니카의 이전 애인들을 모두 처형하고 자기가 원하는 여성의 남편을 살해하도록 지시하기도 했으나, 셋째 아내에게 육체적 폭력을 일삼고 모니카가 나라를 떠나자 그녀를 '국가의 반역자'로 선포하고는 국민들이 '모니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도 금지시킨 것도 모자라 중앙은행 총재에게 아내를 추적하라는 지시까지 내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응게마는 클라라와의 결혼 생활 속에서도 [[독일]]계 물라토였던 간호사 프리다 크로너(Frida Kroner)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며 그녀의 남편의 살해를 지시했으며, 전직 산타 이사벨 시장 아빌리오 발보아 아킨스(Abilio Balboa Arkins, 1906~1967)와의 관계에서 아이를 가졌다는 소문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마시아스 응게마의 전복 직후 마시아스 응게마와 어떤 종류의 감상적 관계도 맺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여하튼 응게마의 여자들은 거의 모두 남편을 버리고 해외로 도피했다. 살아남은 자식들(아들 2명+딸 2명) 중 이미 [[쿠바]]로 유학을 간 장남 필리베르토 은투투무(Filiberto Ntutumu Nguema Nchama, ?~)[* 1953년생이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 않다. 정황상 1964년 이후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더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를 제외한 나머지 3명[* 장녀 마리벨(1968~), 차남 파코(1970~), 차녀 모니카(1972~)]은 1979년 4월 중순에 이들의 어머니와 같이 북한의 평양으로 보내졌기 때문에 쿠데타를 피할 수 있었다.[* 사실 응게마가 자식들을 북한으로 보낸 이유도 응게마가 자신이 실각할 것을 예감하고는 자식들이라도 안전한 곳에서 지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응게마는 전술한 것처럼 김일성과 친한 관계라 김일성이 가족들을 안전하게 보살펴 줄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최악의 독재자에게도 의외의 인간미(?)는 있었던 셈.] 이들은 계속 북한에서 지내며 북한에서도 최고위층 자녀만 들어갈 수 있는 [[만경대혁명학원]]에 다니며 좋은 대우를 받았으며, 모두 1990년대에 북한을 떠났다.[* 마리벨은 의학 공부를 더하기 위해 중국으로, 파코는 조국 적도 기니로 떠났다고 한다. 모니카는 후술할 내용을 참조.] 특히 7살에 피부색, 언어가 완전히 다른 머나먼 이국으로 떠난 막내딸 모니카(Monica, 본명은 모니크(Monique). 1972~)[* 맏오빠와 무려 '''19세'''나 차이난다.]는 아버지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모국어인 [[스페인어]]를 완전히 잊어버렸고, 이후 평양에서 '검은 피부의 북한인'으로 살며 만경대혁명학원에 진학한 후 평양경공업대학 피복공학과에 진학한 후 1994년 여름에 북한을 떠나고는 중국을 거쳐 10년간 스페인 사라고사에서 살다가 미국 뉴욕을 거쳐 2006년 밀에 [[대한민국]]으로 이주하여 [[서울]]의 한 의류회사에 취업한 후 2009년 봄에 한국을 떠났으며, 이후 모국과 스페인을 오가며 서울 [[동대문]]에서 원단을 구입해 옷을 만들어 팔았다. 2013년에 '모니카 마시아스'라는 이름으로 '나는 평양의 모니카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한국어 회고록을 출판했고, 현재 모니카는 영국 런던에서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에 체류했던 기간이 15년이나 되다 보니 한국어가 매우 유창하다. 그리고 모니카는 서울에 도착한 후 "평양보다 복잡하고 사람이 많을 뿐,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며, 덤으로 모니카에게는 북한과 남한이 '완전히 다른 나라'가 아닌, 똑같이 자기가 사랑하는 배달민족이 사는 땅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https://www.koya-culture.com/news/article.html?no=102797|#]] [youtube(ir2KYy7bokQ)] 한편 응게마의 장남인 필리베르토 은투투무 응게마는 아버지의 극단적인 반지성주의 행각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걸었는데, 아버지의 생전부터 [[쿠바]], [[소련]] 등지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토목공학을 공부한 후 테오도로 오비앙 정권에서 말라보 국립 중등교육원 교수와 이사, 교육과학부 사무총장과 차관 등을 역임하다가 2003년 2월 11일부터 2010년까지 여당인 [[적도 기니 민주당]](PDGE)의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적도 기니 민주당은 명시적인 당대표, 원내대표가 없으니 응게마가 사실상 당의 1인자나 다를 바 없던 셈이다. 물론 PDGE가 장악한 적도 기니의 의회는 정부의 결정에 반대하는 일이 없다시피한 거수기 수준이니 PDGE가 정계에 미치는 실질적 영향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여당 사무총장으로서 그는 과도한 족벌주의와 독단적인 행동으로 물의를 빚었는데, 그의 남동생(파코)은 '사무차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당에 막대한 권한을 행사했다고 한다. [[https://diariorombe.es/magazine/filiberto-ntutumu-nguema-hombre-animal-y-cosa/|출처]]] 2009년 대선에서는 PDGE 캠페인의 이사로 일하기도 했으며, 2010년에는 교육과학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 가 스페인 외무부 장관 미겔 앙헬 모라티노스(Miguel Ángel Moratinos Cuyaubé, 1951~)가 부여한 대학 장학금을 활용하기 위해 스페인 여행을 준비하고 있던 기니 학생들의 출국을 막은 것이 알려지며 2011년에 장관직에서 퇴출된 후 러시아의 적도 기니 대사로 좌천되었다가 2015년 4월 9일 적도기니 국립대학교의 총장으로 임명되어 2023년 현재까지도 총장직을 수행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